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병규(1974)/선수 경력 (문단 편집) == [[LG 트윈스]] 1기 (1997~2006) == ||<#182132> [[KBO 골든글러브|[[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height=40]]]] [br] [[틀:KBO 골든글러브/외야수/1900년대|'''{{{#b58a5d KBO 골든글러브}}} {{{#ffffff 외야수 부문 수상자 (1997, 1999, 2000, 2001, 2004, 2005)}}}''']] || [[파일:external/dimg.donga.com/2002103004660000.jpg]] [* 컴투스 프로야구 매니저에서 선수 카드 이미지로 사용된다.] [[파일:external/image.kbreport.com/%EC%9D%B4%EB%B3%91%EA%B7%9C3.jpg]] [[파일:9,6,2.jpg]] [* 왼쪽부터 이병규, [[류지현(야구)|유지현]], [[김동수(야구)|김동수]]. 세 명 모두가 LG의 신인왕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촬영 시기는 1999년 여름으로 추측된다. 당시 LG가 민소매 유니폼을 하계 유니폼으로 도입하였고 그 해 시즌 종료 후 김동수가 삼성으로 이적했기 때문. 여담으로 이 해에 세 명 다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2021년을 기준으로 1군에서 감독, 수석코치, 타격코치로 함께했었다.] 데뷔 시즌인 1997년에 5번 타자로 활약하며 .305의 타율로 신인왕과 골든글러브를 획득했다.[* 1997년 신인왕 수상 당시 성적이 0.305/7홈런/69타점/23도루. 상식대로라면 테이블 세터로 기용되었어야 했지만 2번 자리에 [[동봉철]][* 이 때 [[김재현(1975)|김재현]]은 신장염으로 97 시즌 내내 나오지 못 했다.]이 있었기 때문에 4번 [[심재학]]과 하위 타선의 [[김동수(야구)|김동수]]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기 위해 5번 타자에 자리했다.]그리고 이병규는 2019년 시즌까지 LG가 배출한 마지막 신인왕이었다. 하지만 2019년 시즌 후 [[정우영(야구선수)|정우영]]이 신인왕을 거머쥠으로써 마지막 신인왕, 다만 골든글러브의 경우 [[삼성 라이온즈]]의 [[신동주(야구)|신동주]]나 [[최익성]]보다 부족한 성적을 올렸음에도[* 최익성은 3할 타율을 치지는 못 했지만 20-20을 했고 신동주는 아예 타율이 0.326으로 이병규보다 더 높았다.] 수상했기 때문에 지금 팬들은 잘 모르는 논란거리. 1998년은 약간의 2년차 징크스를 겪으며 .279의 타율에 그쳤으나, 방콕 아시안 게임 드림팀으로 참가하여 병역을 면제받았다. 그리고 3년차인 1999년에 기량이 만개하여, 30홈런 - 30도루라는 괴물 같은 성적을 내며 [[30-30 클럽]]에 올랐다. 이는 한국인 좌타자로는 현재까지 유일한 기록이다. 데뷔 이후 첫 두 자릿수 홈런 시즌을 30홈런으로 장식하며 장타율 또한 무려 2할이나 상승했다. 다만 이 1999년이 역대 최악의 타고투저 시기였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1999년에만 30-30 가입자가 이병규, [[제이 데이비스]], [[홍현우]] 3명이나 되었고, 홈런으로만 한정해도 [[양준혁]], [[심정수]], [[마해영]] 등이 30개 이상을 쏘아올렸다. 그러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이 시즌 이병규의 WAR은 KBO 단일 시즌 중견수 WAR 2위이다.[* 1위는 [[이정후/선수 경력/2022년|2022년의 이정후]].] 같은 잠실을 홈으로 쓰는 거포 우즈, 김동주, 심정수의 홈런 개수도 각각 34개, 22개, 31개 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거포보다는 교타자에 가까운 이병규가 잠실을 홈으로 30-30을 기록한 것이 대단한 것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 이후로도 여러 번의 타고투저 시즌이 있었으나 잠실을 홈으로 쓰는 선수 중 30-30을 달성한 선수는 현재까지도 이병규가 유일하다.[* 참고로 저때 당시에는 수비 WAR을 계산하지 않을 때라 넓은 잠실을 홈으로 쓰는 발빠른 중견수 이병규라면 수비 스탯을 반영했을때 종합 WAR이 더 올라갈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게다가 기록한 타점 수가 99타점으로 1타점만 더 올렸다면 3할-30홈런-100타점도 달성할 수 있었으니 역대급 시즌이라 할 수 있다. 이후로도 두 자릿수 홈런에 60~70타점 이상을 칠 수 있는 타격으로 꾸준히 활약했다. 그렇지만 도루의 경우 크게 감소하는 양상이었는데 2002년부터 겨우 8~10개를 왔다갔다 하다가 2006년에는 겨우 3개를 기록할 정도로 급격히 감소해 버렸다. 도루 감소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특히 2003년 시즌 도중 십자인대 파열 부상을 당해 발이 예전만 못해진 게 그 원인인 듯 싶다.[* 당시 전문가들은 이병규가 재기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았지만 이병규는 그 다음 시즌에 완벽하게 부활한다.] 볼넷:삼진 비율도 계속 나빠져서 2004년 50 : 72, 2005년 34 : 62, 06년 31 : 65. 일본 진출 후엔 슬러거도 아니면서 삼진이 100개를 넘어갔다. 극악의 볼넷:삼진 비율 또한 변명하자면, 첫번째 이유로는 팀의 열악한 전력을 메우기 위해 1번과 3번을 넘나드는 우악스러운 타순 변경이 이유가 되겠고,[* 실제로 한 해에도 1번과 3번을 왔다갔다한 적이 부지기수다. 1번과 3번의 임무가 천양지차인 점을 생각해보면 그 어려움이 느껴진다. 더 이병규가 대단한 것은 어느 타순에 가도 중간 이상의 결과를 끌어냈다는 것. 이는 같은 팀의 박용택도 마찬가지인데, 감독에 따라 1번과 클린업을 오갔으며 강한 2번 드립도 종종 나왔다(...)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의외로 4번 자리는 친 적이 별로 없는데, 2010년이 그나마 유일하다. 2001년부터 일본 진출 전까지 4번을 친 선수들은 댄 로마이어(2001, 퇴출 후에는 양준혁)→매니 마르티네스(2002~03)→[[박용택]](2004~06)이었다. 그리고 박용택은 4번 타자 도루왕을 기록한다.] 두번째 이유로는 선두타자로 나서는 경우 풀카운트까지 공을 끌어내 후속 타자들에게 더 많은 공을 눈에 익게 하려는 임무 수행 과정의 노력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만 3번으로 가도 그 특유의 배드볼 히팅은 그칠 줄을 모르니 그냥 공에 배트가 끌려나가는 성향이라고 봐야할 듯. 그럼에도 3할대의 타율과 100안타 이상을 매 시즌 기록했다. 한편 꾸준히 국가대표로 활약하기도 했는데, 특히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야구 동메달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예선 일본전에서 9회 끝내기 상황에서 나온 안타를 잡아 홈으로 쇄도하던 2루 주자를 [[어시스트(야구)|보살]]시키던 장면은 아직도 회자될 정도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